한국에서 '빨갱이'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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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빨갱이’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10호] 2009년 07월 03일 (금) 11:46:44 김득중 |
국사편찬위원회·한국현대사
info@ilemonde.com
한국 사회에서 ‘좌익’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정치적·사회적인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이
용어가 사용되는 그 순간부터
주장의 정당성은 일거에 박탈되고, 대상자들은 침묵에 빠져든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 장인의 빨치산 활동을 공격했다. 정치권에서 늘 있어왔던
‘색깔 공세’였고, 이러한 공격은 늘 상대편을 수세에 몰리게끔 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그러면 사랑하는 내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 “그렇게 되면 후보를 사퇴하겠다”고 반격했다. 이 발언으로 전세는
역전됐고, 이인제 후보는 결국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여순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가족들. 뒷편에
우뚝 서있는 사람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원인 랠프 블리스
(Ralph P. Bliss) 소령.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왜 이 발언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노무현을 지지하도록
했을까? 노무현은 장인의 좌익 활동을 변호하지도
않았고, 자신에 대한 공격이 근거 없는 색깔론이라고도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짧은 대답은
정치권에서
횡행하던 색깔론 공격을 무력하게 했다.
노무현은 한국 현대사에서 ‘좌익’과 ‘빨갱이’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 수는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발언은 좌익 공격 논리의 가장 약한 고리를 파고든 셈이었다. 노무현의 대답은 ‘좌익도 결국은 인간’임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좌익 세력은 모든 사회 혼란의 원인이자,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취급된다. ‘빨갱이’는
이러한 뜻을
담고 있는 멸시적 용어이다. 이같은 이미지와 인식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죽여도 되는 존재인
‘빨갱이’

먼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와 ‘빨갱이’는 전혀 다른 내포와 맥락, 이미지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이
용어들은
한국 현대사의 진행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공산주의자는 독립을 가장
앞장서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해방 직후에도 공산주의자는 진보적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는 우익 세력의 정치적 경쟁자일
뿐이었다.
한국에서 ‘빨갱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계보학적 과정을 추적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여순 사건’이다.
1948년 10월 19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 만에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제주도 토벌 출동반대’를 외치며
봉기를 일으킨 이
사건은 군인 봉기에 호응한 지역 좌익 세력·학생·주민들이 합세하면서 ‘대중 봉기’로 발전했다.
여순 사건은 봉기와 정부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군인·경찰과 민간인이 죽음을 당한 유혈적 사건이었다. 진압군은
각 지역을 점령한 뒤,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협력자
색출을 시작했다. 우익과 경찰에게 지목된 지역 주민들은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됐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증언자는 “거기는 아주
지옥이었어. 칼빈으로 막 쏴 죽이더라고. 끌려온 사람한테 앉아 있는 사람 중
반란군 협조자를 골라내라고 하더니 지목당한 사람을 옆으로 끌고 가서
쏴 죽였어요. 지목당한 사람은 가차 없이 사람들
있는 앞에서 칼빈총으로 쏴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지역에서 존경받는 중학교 교장,
지방 검사 등은 봉기군을 피해 숨어 있었는데도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었고, 한 국회의원은
인민재판에 참가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탈출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로 죽은 사람들보다 정부군 진압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음에도, 이같은
사건의 실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오히려 사실과는 정반대로 보도됐다.
정부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좌익에 의해 죽었으며, 좌익을
‘살인마’라고 선전했다. 당시 신문들은 정부의 보도자료를
아무런 비판 없이 충실히 지면에 옮겼다. 특히 신문에 실린 사진은 좌익의 주민 학살을
생생하게 전해줘 전 국민이
좌익 만행에 공감할 수 있게 했다. 사건이 진압된 뒤, 여수·순천을 방문했던 문인과 종교인들도 공산주의자들이
참혹한
학살을 자행한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이며, ‘악마’이자 ‘비인간’이라고 주장했다. ‘빨갱이’라는 단어는
정부·언론·문인·종교계의 지식이 총망라돼
형성된 담론의 응결체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빨갱이’라는 낱말에는 이념적 요소가 빠지는 대신 ‘유혈’과 ‘비인간’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각인됐다.
정치적 경쟁자인 ‘공산주의자’로부터 죽여도 좋은 존재인 ‘빨갱이’로의 전환, 빨갱이를 핏빛 어린 폭력적 존재로 형상화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여순 사건이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죽음을 당하더라도 마땅한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반공주의가 압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생산한 여순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는 한 번도 도전받지 않았다. 영화, 사진과 언론, 교과서, 책자 등을
통해 여순 사건에 대한 반공주의적
해석은 60년간 일방적으로 유통되고 반복적으로 재생산됐다.
<광복
30년-여순반란편>(전남일보사·1975)은 좌익 세력이 주민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례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문헌 중 하나이다.
유신체제하에서 발행된 이 책은 “우익에 춤추지 않나 싶을 정도로 우익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으며,
정보 관계자들이 ‘살아 있는 반공
교과서’라고 불렀다.
여순 사건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과 유족들은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왜 자기가 빨갱이로 규정됐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빨갱이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기능을 했는지, 이념적 대립이라고 인식했던 좌우 대립의 밑바탕에는 어떤 정치공학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한국 현대사 연구는
설명하지 못했다.
반공체제 탄생시킨 여순사건

여순 사건은 분단 정부 수립과 국가 건설
과정의 중요한 성격을 드러내주는 ‘감춰진’ 기반이자, 대한민국 반공체제를 탄생시킨
한국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다. 여순 사건은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과 성격,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의 성격, 한국 사회에
그동안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폭력’의 비밀을
드러내준다.
여순 사건의 협력자 색출은 국가 폭력을 통한 ‘편 가르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적으로 규정된 사람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보여주었다. 협력자 색출 과정과 대량 학살은 누가 ‘민족’과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민족 구성원의 자격
심사
과정이었다. 반란군뿐만 아니라 ‘반란 주체들로 간주된 자들=협력자’는 ‘빨갱이’로 간주돼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죽음을 당해야 하는 존재이자
국가 건설에서 뿌리 뽑혀져야 하는 잡초 같은 존재로 취급됐다.
외국의 경우에도 ‘아카’(赤), ‘코미’(commie) 등
공산주의자를 폄하하는 뜻이 내포된 용어들이 있지만, ‘빨갱이’처럼
죽여야 하는 대상, 비인간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빨갱이’라는 용어는 세계 반공주의 역사에서 가장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왜 대한민국은 극단적 반공주의
국가가 되었을까? 분단 정권이라는 약점을 가진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는 두려움, 이에 동조한 대중들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저항 가능성을 봉쇄해야 한다는 압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대중은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극명한 이분법적 인식은 봉기 지역
주민 전체를 적으로 상정하게 했다.
정부 진압군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 모두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여순 사건에서 군경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라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국가 폭력과 숙청은 대중의 저항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제거하는 대중 억압으로 이어졌다. 폭력의 대상은 공식적으로
설정된 외부의 적(공산주의 집단인 북한)이 아니라 내부의 대중으로
확대됐다. 이런 측면에서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를 겨냥하고 있다기보다는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체제가
어느 정도 완성돼 좌익 세력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빨갱이는 계속 만들어졌다.
대중에 대한 폭력으로 시작된
반공주의는 국가보안법 등 법제적 장치와 각종 반관·반민 단체를 중심으로 주민 생활을
구석구석 통제하는 사회 조직화를 통해 점차 모양을
갖춰나갔다. 이제 대한민국 거주자는 ‘반공 국민’으로 탄생됐고,
‘반공 도덕’과 애국심을 가슴 속 깊이 새겨갔다.
어느 사회든 어떤
이념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이런 논의가 활발해지는 만큼 사회는
민주적으로 성숙되며 발전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반공주의는 이념에 따라
형성되지 않았다. 반공주의는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라는 것 외에는 그 안에
어떤 특정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공허한
울림이었고 그 공허함을 강요하기 위해 군경에 의한 노골적인 국가 폭력이 사용됐다. 반공주의는 정치의
핵심을
‘적’과 ‘아’의 구별로 보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통합보다는 배제의 정치를 구사했다. 그것의 논리적 결말은
대중운동의 억압,
민주적 과정에 대한 무시, 전쟁 불사와 상대편에 대한 파괴와 전멸이었다.
여순 사건에서 최초로 시작된 국가 폭력은 4월 혁명,
1980년 광주민중항쟁 등 한국 현대사에서 주기적으로 그 모습이
재현됐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좌빨’이란 폭력적 언어의 횡행
반공주의의 부정적 유산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민은 여순 사건이라는
국가 폭력의 세례 속에서 태어났고, 폭력의 논리는 정치 과정에 내장됐다.
대한민국 형성 과정에서 폭력에 익숙해지고
몸에 받아들인 국민이 국가 외부에 있다고 간주되는 타자에게 폭력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정치 과정에서
적대와 폭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이 탈바꿈하는 길을 모색하려면 반공주의가 남겨놓은 유산을 곱씹어
살펴봐야
한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좌빨’(좌익 빨갱이)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 우리 편과 적을 선명히 구분하면서 일체의 소통을
외면하는
이 용어는 얼마나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탄생됐는가?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직도 자신의 역사에 대해 무감각하다.
60년 전 여순 사건이 남겨놓은
유산은 아직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글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재직 중이며,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공저로 <죽엄으로써 나라를
지키자>(2007·선인)가 있고, 최근에 <‘빨갱이’의 탄생-여순 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2009·선인)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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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공감
광복군 죽이던 일본군 장교가 대통령했던것 부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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