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저 항

제 3 장  저 항
REBELLION
            자유와 위스키는 함께 손을 잡고 간다.
            너의 잔을 들어라.
           “소작인의 진심어린 울음과 기도,”57) 로버트 번즈
가내 증류58)
“둥그스런 남쪽 언덕 모퉁이에 햇살에 잘 익은 보리밭이 있었습니다. 산들바람에는 희미하나마 바다 소리가 실려 옵니다. 밤이 되면 대지의 어머니가 조금은 걱정스럽게 무엇인가에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이 한숨을 지으며 바스락 거립니다.”
“농부는 한해 농사가 잘 되어 고맙다고 신에게 감사를 올리면서, 보리를 베고 수확하여 다발로 묶습니다. 도리깨질 하고 키질을 합니다. 보리 이삭이 황금색 곡물 더미로 될 때까지. 그것은 생명의 빵입니다.”
1935년, 과거에 하일랜드 소비세 직원이었고, 저명 위스키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던 닐 건은 위스키가 처음 만들어지는 시기를 재구성하여, 그것에 관한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단순한 방법으로 곡물을 준비하여 빻고, 발효를 시킵니다. 발효액을 끓이고, 발효액에서 분리된 증기는 차가운 표면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 응결이 됩니다.”
“그러자 아하! 녹황색 발효죽에서 나온 증기의 응축물은 수정처럼 투명합니다. 식어서, 손가락에 닿으면 얼음보다도 차갑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어 이건 뭐지? 잇몸이 얼얼해지고, 목이 타고, 뱃속 밑으로 불이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손끝, 발끝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머리에까지 퍼져 갑니다.”
“그 다음에는 머리가 달아 오릅니다. 눈이 반짝 반짝 빛나죠. 웃음이 불쑥 튀어나오고, 활기가 넘칩니다. 마치 철저한 이성으로 자신을 통제하던 것을 갑자기 멈추듯이. 팔 근육들이 살아 움직입니다. 주먹이 불쑥 나오죠. 왼쪽 오른쪽, 그러한 에너지들로 사람들은 충만해집니다. 다리에도 역시 같은 에너지가 생깁니다. 자유분방한 원초적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마신 것은 물이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마신 거랍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생명의 물이란 뜻으로 위스게 바하59)라고 이름을 붙였다. 닐 건의 시적인 생각은 상상 속에서나 나올 것 같지만 그리 사실에서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위스키 제조의 첫 시도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증류는 대체로 가내수공업이었고, 계절의 순환과 밀접하게 묶여 있었다. 하일랜드 사람은 봄에 강인한 보리씨를 파종하고, 늦여름에 작물을 수확하여, 겨울에 걸쳐 그 곡물을 건조시켰을 것이다. 곡물을 털어낸 짚은 가축사료와 시골집 바닥에 단열재로 사용되었다. 3월이 되어 개울에 있는 얼음이 사라지면 증류작업이 시작된다.
소용량 구리 냄비 증류기60)(이하 포트스틸로 부른다)는 대체로 시골집 구석에 설치되었는데, 피트탄 화력으로 가열하였다. 집에서 재배한 보리에다가 강물을 섞어서 만든 발효 혼합물을 가열하면, 증기는 물에 잠긴 튜브로 내려간다. 초기 포트스틸로 한 증류작업은 주전자에 맥주를 끓여서 그 증기를 식히는 과정과 같은 것이었다.
 갓 뽑아낸 (알콜 도수가 높은) 농축 술은 바로 사용하기 위해 숙성시키지 않고 주전자와 작은 통에 따라 부었다. 위스키는 공동 사회적 성격이 있었고, 모임을 즐겁게 하는 술이며, 약효가 있다고 믿어졌고 또한 소작료, 상품 또는 서비스를 위하여 화폐와 같이 가문내 이웃들과 교환되었다. 위스키는 공동체 생활의 주춧돌이 되었다. 위스키는 한때 통화 형태로 물물교환에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16세기에, 킨타이어에 있는 한 농가는 소작료로 위스키 6 쿼트61)를 지불하였다.
위스키 제조에 사용되는 보리 또한 가문수장에게 소작료의 형태로 지불되었다. 때로는, 가문수장이 증류를 위해 필요한 양보다 보리를 더 받았을 경우에는, 그들은 그 과잉보리를 에일 맥주를 양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공동체 사회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위스키였다. 잉여보리를, 금이나 은보다도 더 좋은 환금성이 높은 위스키로 만들지 않는 농부는 거의 없었다.
위스키의 원료가 되는 보리도 또한 가문 수장에 임차 비용 대신 사용되고 있었다. 증류에 필요 이상의 보리를 거둬 들였을 경우에, 가문 수장은 그것을 에일맥주 양조​​에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을 생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위스키였다. 잉여 곡물이 있다면, 금보다 환금성이 높은 위스키를 만들지 않을 농민은 없었다.
그림 16 가내 증류 (The Irish Whiskey Still, David Wilkie
(1785–1841)
항상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는 권세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는 일요일 음주를 탐탁찮아 하였다. 1579년 초기에 위스키 억제 정책을 펼쳤는데, 금주를 장려하기 위한 여러 규제들을 위스키 제조업자들에게 적용하였다.
만취와 무법행위에 우려를 가지고 있던 의회도 똑같이, 1609년 만취한 갱들에 의해 폭동과 불화를 겪은 이후에 웨스턴 아일스62)에서 위스키를 압수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위스키를 압류하려는 정책효과는 밀조를 활발하게 유발하였을 뿐이었다.
위스키는 일상생활 아주 깊숙이 녹아 들어가 있었다. 위스키 제조업자를 규제하기 위해 부당한 제도가 만들어지고, 유통을 제한하고, 서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과세를 하자, 선량한 모든 스코틀랜드 사람의 저항의식이 들풀처럼 피워 올랐다.
위스키 세금
영국 재무 장관이 1995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위스키 한 병당 27 펜스63)까지 세금을 감면한 것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위스키 세금이 내린 것은 100년 동안 처음이었다.
1644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처음으로 위스키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왕당파와 겨루는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빈곤한 런던 의회파를 지원하기 위해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잉글랜드 파인트64)의 3배였던) 스코틀랜드 파인트 당 2실링 8 펜스의 세금은 스코틀랜드에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수개월 내에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지역이 밀조지대로 바뀌었다.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가담하였습니다.” 위스키 역사가 스티브 실렛은 말한다. “스코틀랜드 전체를 통틀어서 세금을 제대로 내면서 제조된 위스키는 정말 적었습니다.”
괜찮은 도로도 별로 없는 스코틀랜드에서 세금 징수원이 세금을 징수하는 어려운 작업에 착수하였을 때, 그들을 피하기 위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수법도 진화하였다. 피를 부른 작은 충돌들도 있었지만, 주로 하일랜드 사람들은 유머와 묘책을 발휘하여 궁지를 헤쳐 나왔다.
“예를 들어 커크윌65) 시청은 방문하는 세금징수원을 맞이하기 위하여  화려한 연회가 자주 열리는 현장이었습니다.” 라고 스티브 실렛은 말한다. “단 하나의 목적은 지방의회 의원들이 세금징수원의 밀주적발 계획에 대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추어진 위스키 역사에 대한 스티브의 관심은 그가 하일랜드에 있는 27개 증류소를 담당하는 소비세 공무원으로 업무를 할 때 시작되었다. 위스키 밀조 업자에 대한 역사서, “불법 스카치 위스키66)” 를 쓰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7년이 걸렸으며, 그의 저서는 밀주에 관한 정평 있는 책이 되었다.
17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술에 세금을 부과하는 더 많은 소비세 법령이 봇물을 이루어 일부 노동자들은 임금으로서 감내해야 하였다. 1681년에 모든 지역에 맥아 세금이 부과되었다. 1695년이 되면 증류주 1 파인트 당 2 실링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동년에 맥아 세금은 폐지되었지만 기뻐한 것도 잠시, 증류주 파인트당 세금을 3 펜스 더 올렸다.
“스코틀랜드 북서쪽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루이스 섬에서는, 밀조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지주들은 소작료로 위스키를 기꺼이 받았습니다. 농가 임차인은 하부 임차인에게 증류를 하라고 귀리를 빌려주었을 겁니다.” 라고 스티브는 설명한다.
“불법 증류업자, 소작인 그리고 지주는 전적으로 상호의존적이었습니다. 치안판사가 으레 경미한 벌금을 부과하는 한, 그들이 짭짤한 수익이 나는 밀조를 중단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치안판사들은 확실히 밀조업자들 편이었다. 정말 많은 치안판사들이 불법 밀조에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고, 수백 파운드의 이익을 올렸을 경우에도 단지 2~3 파운드 정도 체면치례용 벌금을 부과하였다. 하다못해 지주이자 치안판사였던 테인에 사는 윌리엄 머레이는 광범위한 지역에 있는 증류업자에게 보리를 공급하였다. 많은 변호사들이 사례금으로 위스키를 받았으며, 치안판사도 종종 관대한 처벌의 보답으로 위스키를 받았다. 캠벨 타운의 한 여성은, 판사가 그녀를 체포하였을 때에 이렇게 항의하였다. “당신에게 위스키를 보낸 이후에 한 방울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의회가 합병하면서 소비세를 가혹할 정도로 인상하였는데, 그로 인해 위스키 가격이 노동자 계급의 손에 닿지 않을 정도로 인상되었다. 잉글랜드 세관감시관들이 세금을 징수한다는 결의를 가지고 국경 너머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로부터 90년이 지나서도 그들은 여전히 시도하고 있었다.
1725 년에 추가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번에는 맥아 1 부셀 당 3펜스였다. 이 증세에 의해 증가하는 정부의 순이익은 불과 2만 파운드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월폴 총리가 스코틀랜드에게 영국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차원에서 더 고려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분개에 찬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글래스고에서 파괴 등을 저지르며 광란하였고, 맥아 제조업자들도 세금징수원이 그들의 재고를 파악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1777년에 에딘버러에만 408개의 증류소가 있었는데, 단지 8개 증류소만 세금을 납부하였다. 이 무렵 위스키는 국가 상징물이 될 정도로 일반화되어 중산층과 상류층 사람들은 심지어 아침에도 위스키를 마셨을 정도였다.
이 당시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위스키와 와인을 마셨다. 1770년 프랑스 여행가 루이 시몬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평균적으로 하일랜드 사람은 하루에 약 1쿼트(1리터 정도)의 위스키를 소비하였습니다. 그렇게 독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도 감내할 수 있을 정도였다니, 그렇게 일상적으로 많이 자주 마셨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랬다. 16~17세기에 과음은 일반적이었다.
“어떤 사람은 계속 술을 마실 수 있게 와인 잔에서 받침을 없앤 술잔이나 바닥이 둥근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내려 놓지 못하고 손에서 손으로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라고 스티브 실렛은 말한다. “건배는 저녁 식사 후 여흥시간에 흔하게 하였으며, 퍼스샤이어 지역에서는 어떤 손님이 건배할 때 잔을 비우지 못하면, 다시 잔을 가득 채우고 마셔야만 하는 규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곡물과 물로 손쉽게 제조된 위스키는, 시골에서는 저렴한 술이었고, 탈세는 일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1770년 페린토시와 글렌리벳 지역에서 생산된 최고급 위스키의 가격은 1 스코틀랜드 파인트 당 1실링 10펜스67) (영국돈으로는 9페니)였다.
1782년, 약 1,940개의 증류기가 압류되었지만, 위스키 생산에는 거의 영향이 없었다. 위스키 증류는 애국적 행위가 되었고, 국민 술인 위스키를 제조하는 것은 스코틀랜드 사람의 특권이기 때문에 세금을 납부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발렌타인 17년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몰트 중의 하나를 생산하고 있는 아드벡 증류소는 아일레이섬 외진 만에 있는데, 마치 요새와 같이 세워졌다. 저항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증류소를 지킴에 있어서 무시무시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저항 위스키 제조업자들이 물건을 실고 메인랜드 지역으로 항해를 떠나서, 그 증류소를 텅 비운채로 남겼을 때, 그때서야 비로써 세무 직원들은 증류소를 접수할 수 있었다. 세무 직원들은 침입하여 증류기를 박살내고 증류소를 파괴하였다. 아드벡 증류소는 나중에 정식면허를 받고 복원되었다.
몇몇 불법 고급 위스키는 스페이사이드 지역에서 만들어졌는데, 그곳은 현재 스코틀랜드에서 증류소가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다. 글렌리벳 지역 한곳만 하더라도 200개 이상의 증류기를 가동하였는데, 동굴에 숨기거나 나뭇가지로 가리거나 또는 포장하여 말을 이용하여 밤에 다른 장소로 이동하곤 하였다. 증류기를 옮김에 있어서 물 공급은 정말 중요한데, 시골 깊은 곳에 증류기를 은밀히 숨기고는, 물을 공급하기 위해 개울의 흐름을 바꾸곤 하였다.
스페이사이드 더프타운 근처에 있는 저항 증류업자들은, 현재에도 몇몇 유명 증류소에 물을 공급하는 벤 린즈 지역의 개울물을, 어둠을 틈타 거의 1마일(1.6 킬로미터)에 가까운 도랑을 파서 끌여 들였다.
“증류기에서 처음 나오는 위스키는 언덕 꼭대기에서 축배를 들기 위해 한 쪽으로 챙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작업은 꽤 늦은 밤에 이루어졌답니다. 그래서 다음날 점심시간 전에 귀가하는 밀조업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라고 스티브 실렛은 말한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왕래가 많은 도로는, 위스키 밀조업자들이 조랑말을 이용하여 보리 또는 몰트를 몰래 증류기로 나르고 생산한 술통을 다시 나르는, 언덕 위에 나 있는 위스키 길이었다. 남부 도시에 벌크 위스키 공급을 하기 위하여 150여 마리의 짐 나르는 말로 이루어진 수송대가 이용하는 위스키 길도 있었다.
비츠핵68), 래더69), 잭스 로드70), 그리고 펀질71) 같은 이름을 가진 옛길들은 시골길, 수레길 그리고 등산객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언덕길 형태로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위스키 길은 지도로 만들어진 적이 없어서, 얼마나 긴지 어느 누구도 모른다. 거리는 한 시간 거리의 크로스 컨트리 종목에서 8시간 거리의 여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위스키 길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 몇몇을 보여 주고 있다.
“하일랜드에서는 거의 모든 농가가 자기 증류기를 가지고 있었고, 아주 기발한 독창성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양조 · 증류 공정을 진행할 때에 그치지 않고, 순회 세무 직원의 접근을 다른 사람에게 경고를 울리는 부분에 까지 이릅니다. 농민들은 세금 징수원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면, 다른 농민들이 소중한 위스키 기구들을 숨길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피트 무더기 꼭대기 위에 급히 천이라든가 깃발 등을 게양함으로써 경고를 하였습니다.” 라고 스티브 실렛은 말한다.
“19세기 초 스털링에 있는 부유한 한 여관 주인은 위스키 재고를 보충해야 할 때마다 하일랜드 퍼스샤이어72)에 장례 행렬을 보내곤 했습니다. 밀수 위스키 탁송물 운송로는  글렌리벳에 있는 브레이스에서 더프타운까지 이르는 20마일 길로, 구슬픈 표정을 짓는 가짜 장례객 책임 하에 자주 운반되었습니다. 지방 세무 직원은 거리를 두고 조의를 표하였답니다.”
현상금으로 유혹하여도 거의 효과가 없었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정부는 불법 증류기를 신고하는 사람에게 5 파운드를 주겠다고 발표하였다. 특유의 풍자적인 유머를 발휘하여, 증류업자들은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가내 증류에서 가장 비싼 부품은, 수증기화된 저알콜을 응축하여 주전자나 통에 떨어 뜨릴 수 있게 해주는, 물에 잠기는 구리로 만든 코일형 웜73)이었다. 이 코일형 웜이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불법 증류업자들은 그것을 세금징수원에게 가져가, 내가 불법 증류기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면서 5파운드를 요구하였고, 새 코일형 윔을 구입하는데 그 돈을 사용하였다.
그림 17 보니 프린스 찰리

1740년대에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가장 혹독한 탄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가장 큰 이유는 스코틀랜드의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인 보니 프린스 찰리74)가 일으킨  사건 때문이었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는 1745년 프랑스에서 탈출하여 제임스 2세의 생존하는 유일한 아들인 그의 아버지 제임스를 대신하여 왕위를 주장하였다. 찰스는 가지고 있는 보석을 처분하여 대장정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병사를 나르는 두 번째 선박이 태풍으로 부셔져서 겨우 7명만이 함께 겨우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일랜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5개월 동안 찰스왕자와 충신들은 가문 수장들을 만나며 하일랜드를 순회하였다. 그는 하일랜드 문화의 상징 때문만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벨트에 위스키를 달고 행군하였다. 그가 위스키를 사랑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맥도널드 가문 두명의 수장과 가진 회의에서는 3일 밤낮 동안 위스키를 마셨다. “우리보다 강하다.” 라고 발쉐어 지역의 맥도널드는 인정하였을 정도다.
찰스 왕자를 지원하는 세력은 점차 늘어났다. 1745년 글렌피난에서 반란의 깃발을 올렸고, 그해 9월에는 수도 에딘버러를 접수하였으며, 프레스톤팬즈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를 스코틀랜드의 구세주로 보고 모여든 군대를 이끌고, 그는 과감하게 국경을 넘어 런던을 향해 250 마일에 이르는 행군을 하였다. 진군 도중에 칼라일을 수중에 넣고, 잉글랜드 군대의 압도적 병력과 맞닥뜨린 것은 거의 미들랜드에서 다다를 즈음이었다.
 잉글랜드 군은, 가까스로 폴커크에서 마지막 영예스러운 승리를 거둔 후에 1746년 4월 컬로든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찰스왕자를 추격하였다. 그것은 잉글랜드 본토에서 싸운 마지막 전투였다.
보니 프린스 찰리는 변장하여 스카이섬으로 도망가 1746년 9월에 프랑스로 가기까지 은신하였다. 결코 다시는 사랑하는 스코틀랜드를 보지 못했던 왕자는 좌절하였고, 1788년 로마에서 죽었다.
컬로든 전투 이후, 잉글랜드는 제임스 추종자들인 재코바이트들에 의해 야기된 난처한 상황과 정치적 격변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심하였다. 1747년 금지령으로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전통 의상을 숨겨야만 했다. 법령은 킬트, 플래드 (격자 무늬 어깨걸이천), 타탄, 토루즈 (타탄 바지) 그리고 가문 병사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하일랜드 의복, 심지어 백파이프조차 금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역효과를 낳아, 전통적 스코틀랜드 의복을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한 것이 오히려 하일랜드 단결심을 북돋았다.
이런 가혹한 탄압 정책 하에 런던은 위스키에 더 많은 징벌적 세금을 부과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증류업자들은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불법 위스키 증류는, 타탄을 몰래 입는 것과 같이, 저항 행위가 되었다. 하일랜드 사람들에게 위스키 제조는 연료를 모으고, 곡식을 키우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처럼 중요한 생활양식의 하나에 해당하였다. 증류는 잉글랜드에 저항하는 영웅적이고 긍지 높은 저항 행위로 간주되어 왔다. “자유와 위스키는 함께 손을 잡고 간다.” 라고 로버트 번즈는 썼다. 그리고 저항적인 많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다함께 그의 함성을 계승하였다.
찰스 번즈, “소작인의 진심어린 울음과 기도”에서 온 위 인용구는 위스키를 보호해 달라고 런던에 있는 스코틀랜드 정치가들에게 보내는 호소였다. 많은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같이 번즈는, 강탈적인 위스키 세금들, 진과 비슷한 수준으로 스카치 위스키에게 부과되는 추가적인 세금, 그리고 스코틀랜드 문화에 가해지는 문화 전반에 대한 탄압 등이 위스키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린다고 믿었다.
“분발하라, 제군들! 결단력을 발휘하라,
 어머니 스코틀랜드에게 주전자를 돌려 드리기 위해“
번즈는 시에서 스코틀랜드 정치인들에게 간청하였다.
그렇지만 정부는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가르침을 적용하려고 결정한 듯이 보였다. 그는 거들먹거리며 말하기를, “오래전부터 대영제국의 정책은 국민의 건강을 해치고 도덕을 부패시키는 경향이 있는 증류주 소비를 막는 것이었다. 이 정책에 따라, 증류소에 대한 세금 감면은 위스키 가격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커서는 안 된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특히 정부도 불법 증류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었다. 교회조차 거의 무력했다.
교구 목사에게 책망을 받았을 때 한 증류업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저는 제 증류소에서 증류를 안 하겠다는 맹세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증류외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적합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증류가 어떤 해를 끼친다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정부는 위스키 억압 정책을 낙관적으로 보고 강화하였다. 위스키 검수관이 밀조자를 빨리 검거하여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새로운 도로도 놓았다. 1820년은 대표적인 년도인데, 14,000회 이상의 현장급습을 실시하였음에도, 해당 관청은 세금 징수에 여전히 애를 먹고 있었다.
위스키 수요가 워낙 높아서, 숙성기간 없이 증류기에서 바로 판매되었다. 위스키를 숙성하는 장점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위스키를 와인통이나 셰리통에 저장하였던, 정말 극소수의 귀족과 하일랜드 젠틀맨 계급뿐이었다. 바로 증류할 때 나오는 강렬하고 거친 맛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백리향과 같은 약초, 민트, 설탕 그리고 향신료를 첨가하였다. 때로는 거친 연기 매운맛을 숨기기 위하여 코디얼75), 펀치76) 또는 토디77)에 넣어서 마셨다.
그러나 그 불법 행로는 기대치 못한 장점을 가져다주었다. 세금 징수관을 피하기 위해 언덕 깊숙이 도망친 것이, 피트와 보리의 풍부한 공급뿐만 아니라 매우 순수한 수원까지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다. 반면에 증류기 크기와 워시78)의 알콜농도를 통제하는 관료주의적 규제는 면허를 받은 하일랜드 증류소에서 생산하는 위스키의 질을 나쁘게 만들었다. 면허 하일랜드 제조업자들은, 증류기 옆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몰래 애지중지 손으로 만든 위스키와 경쟁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면허 증류소들은 규제를 어기거나 또는 밀조업자들이 만드는 우수한 위스키에게 시장을 내어 줄 것이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1800년대 초,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판매된 절반은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때로는 세금 때문에 뛰어난 증류업자들이 파산하였다. 가혹한 세금은 최고의 위스키 생산업자들을 폐업으로 내몰았다. 합법적으로 생산한 위스키의 50%를 공급하던 5개의 회사는 1788년에 사업을 접었는데, 총 700,000 파운드(오늘날 금액으로 1억 5천만 파운드 이상)의 세금 때문이었다.
화해
그림 18 조지 4세
 스코틀랜드 문예부흥은 1822년 조지 4세가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는데, 그 행사 때에 실질적으로 불법화되어 있던 위스키를 공개적으로 시음하였다. 국왕은 양국 사이의 깊은 골을 치유하기 위하여 엄숙한 의식을 치르며 에딘버러에 들어갔고, 대연회장에서는 킬트를 착용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 모두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국왕이 공식석상에서 위스키를 시음하고 완전한 하일랜드 예복을 과감하게 착용함으로써 타탄, 위스키 그리고 스코틀랜드적인 모든 것이 부활하였다. 간접적으로, 국왕의 위스키 건배는 양국 사이의 깊은 골을 치유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같은 해, 스코틀랜드에서 대지주 중의 한 명인 고든 공작은 합법적 증류를 장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영국 상원을 설득하였다. 그는, 위스키는 하일랜드의 전통적인 음료이며, 궁극적으로 스코틀랜드인 누구라도 증류를 방해 받아서는 안 된다, 밀조업자를 음지에서 양지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였다.
그림 19 플러스카든 수도원
세금을 징수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징수과정에서 많은 자원이 빠져나가는 것을 자각하자, 정부는 불법 증류를 억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통제상태 하에 위스키 제조를 장려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고든 공작의 지혜로운 말을 계기로 영국정부는 마침내 굴복하고, 1823년 타당한 증류면허 수수료를 도입하였다.
이 법령은 증류업자들이 용량이 40갤런 또는 그 이상의 증류기 1개당 10파운드의 면허세를 납부하면 고발당할 염려 없이 생산할 수 있게 하였다. 숙련공들은 감옥에 갇힐 위험 없이 일을 할 수 있어 환영하였다. 음지에서 양지로 온 많은 증류업자들은 밀조시대에 만든 높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하여 같은 장소와 수원을 선택하였다.
처음 면허를 신청한 두 개의 증류소는 발블레어와 밀튼더프인데, 위스키 밀조시대에 있어서는 번성한 중심지였고, 지금은 발렌타인 17년에 있어서 중요한 몰트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다.
비옥한 보리밭으로 둘러싸인 밀튼더프는, 끊임없이 위스키를 생산하는 엄청나게 큰 밀조 중심지였다. 지금도 여전이 밀튼더프 증류소에 물을 공급하고 있는 블랙번 이라는 개울물이, 밀조시대에는 플러스카든 계곡에 있었던 여러 소규모 밀조 증류기에 물을 공급하였었다.
블랙번은 근처에 있는 플러스카든 수도원의 베네딕트파 수도사들도 양조와 증류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던 곳으로, 신성한 수원으로 간주되었다.  알프레드 버나드는 1886 년 유명한 기행문 「대영 제국의 위스키 증류소79)」에서 15세기 어느 새해, 위스키와 에일맥주 제조를 위해 물을 사용하기 전에 수도사들이 수원을 축복하는 광경을 전하고 있다.
“수도회 부원장, 성지 순례자 그리고 사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연로한 수도원장이 개울둑으로 나아가서, 돌 위에 무릎을 꿇고 손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그 물을 축복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증류한 생명을 주는 음료는 그 후에 아쿠아 비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장이 무릎을 꿇었던 신성한 돌이 밀튼더프 맥아 방앗간 벽에 붙박여 있는 것을 버나드는 목격하였다.
합법화한 초기 증류소 중에 또 하나는 1826년부터 부드럽고 버터 맛이 나는 몰트 위스키를 생산한 글렌드로낙 증류소였다. 새로운 법령 하에서 증류소 경영은 현실적인 조치로 판가름 났으며, 언덕에 숨어있던 많은 증류업자들이 양지로 나왔다. 위스키 제조는 가내 수공업에서 대규모 국제 산업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렇지만 일부 밀조업자는 시대 변화를 따르지 않아서 불법 밀조시대의 종언과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가장 유명한 불법 밀조업자 중의 한명은 글렌드로낙 근처 헌틀리 출신으로 현지에서 “고센”이라고 알려진 제임스 스미스였다.
“고센은 제품력뿐만 아니라 순전히 증류주 생산량에 있어서도 밀조 업자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방문객들이 한결같은 그의 넉넉함에 열렬한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위스키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 신중한 침묵을 유지하려는 마음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방문객이 위스키를 마시면 못마땅해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라고 스티브 실렛은 믿는다.
세금징수원의 습격을 받아 마침내 고센이 체포되고 유죄를 선고 받았을 때, 그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총 10 파운드의 벌금을 받았다. 진짜 심한 처벌은 그가 사랑하는 증류기를 압수하고 부숴버린 것이었다. 그때가 그가 위스키를 제조한 마지막 시기였으며, 위스키 장비를 상실한 후, 조용히 은퇴하여 마을 약국 주인이 되었다.
위스키 산업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위스키는 확장과 혁신의 시대로 들어갔으며, 그 시대에 조지 발렌타인과 같은 기업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기까지의 영어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 로버트 번즈 : 스코틀랜드의 농부 시인
그림 20 로버트 번즈

로번트 번즈는, 이 책의 모든 장 첫머리에 그의 시가 인용되고 있는데,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시인이자 국가적 영웅이며, 또한 정열적인 남자이자 위스키 애호가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남서부 에어셔에 있는 한적한 마을의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1759년 1월 25일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번즈는 영어, 프랑스어, 수학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독서를 폭 넓게 하라고 격려했다. 아버지 윌리엄으로부터 셰익스피어와 다른 고전 작가들의 즐거움을 얻었고, 어머니 아그네스로부터 동화, 자장가와 동요에 대해서 이른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런 문학적 가정교육의 두 측면이 그의 시를 형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젊은 로버트는 아버지를 도와 종종 소득도 없고 정말 중노동인 밭일을 하였다. 14살 때 함께 밀을 수확하던 소녀와 사랑에 빠졌고, 그의 처녀시 “아름다운 넬80)”로 그녀에게 영원성을 주었다.
청소년기에서 성인으로 이르는 시기에 걸쳐서 많은 연인을 사귀고 많은 시를 지었다. 1782년 22살의 나이에 엘리자베스 개비81)와 약혼을 하였지만, 못마땅해 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그 약혼을 깨뜨렸다. 부서진 사랑을 잊기 위하여 번즈는 어빈으로 떠나 아마 섬유82) 무역을 배웠다. 그는 사랑을 잊기 위하여 음주와 회사 일에서 위안을 찾았다. 아마 섬유 무역에 대한 모험은 그가 일한 가게가 잿더미가 되었을 때 막을 내렸다. 그는 무일푼이 되어 집으로 돌아 왔다. 3년 후에 아버지 윌리엄이 로버트에게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가족 농장을 유지해 나가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면서도, 로버트는 시를 쓰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였다. 이 시기의 시는 자연에 대한 그의 친밀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삽으로 뿌리 채 캔 섬세한 꽃을 다룬 “산에 피는 데이지에게83)“, 그리고 쟁기로 작고 소심한 동물인 쥐의 둥지를 뒤집어 놓고 쓴 “생쥐에게84)”란 작품이 있다. 그의 가정문제와 판에 박힌 일상생활을 드러내는 다른 유명한 작품으로는 시골 사람들 특유의 단순성의 장점을 찬양한 “오두막집의 토요일 밤85)”, 방랑자의 삶을 주제로 한 “행복한 거지86)”, 위스키를 축하하며 쓴 “스코틀랜드의 술87)”, 그리고 “소작인의 진심어린 울음과 기도88)” 등의 작품이 있다.
1785년, 아내인 진 아모어를 만났지만, 그럼에도 다른 여성들과의 복잡한 애정관계를 계속해 나갔다. 또 다시, 신부 부모가 이번에는 혼인 문서를 파괴하면서까지 혼인을 반대하였다. 깊이 상처를 받은 번즈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자메이카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선박권을 구하기 위하여 시집을 발간하였다. 스코틀랜드 언어로 주로 쓰여진 그의 시는 1786년 킬마넉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초판 600부가 매진되는 선풍적인 성공을 거뒀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번즈는 이민을 가겠다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시집을 만들기 위하여 에딘버러로 갔다.
출판 1년 후, 정말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번즈는 에딘버러 문학회에서 칭송을 받았다. 그의 선천적인 겸손과 원기왕성한 개성은 널리 알려졌다. 그의 열정적인 기질과 정사(情事)를 포함하여.
번즈는 책으로 번 돈으로 몇 번에 걸쳐 스코틀랜드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하면서 노래를 편집하고 그에게 영감을 준 산, 호수 그리고 숲을 방문하고, 역사적 유적지를 방문하고 그리고 스코틀랜드 시골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위스키를 마시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잠시 농사를 짓기도 하였지만, 그 다음에 덤프리스에서 세금을 걷기 위하여 증류소에서 증류소로 여행하는 정규 세무직원으로 근무하였다. 1792년, 번즈와 그의 동료들은 솔웨이 만 근처에서 한 밀조업자 선박 로사몬드호를 포획하였다. 후에 번즈는 군함용 총기 4정을 구입하여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기부하였다.
그림 21 커티삭
확실히 그 직업에 재능이 있어서, 1794년 그는 부감독자 지위로 승진하였다.
번즈는 위스키에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위스키를 엄청나게 마셨고, 그에 관하여 표현이 풍부한 시들을 썼다. 불행하게도 지방 여관에서 장기 숙박하는 도중, 야외에서 잠이 들었다가 류마티스성 열병에 걸렸다. 솔웨이 만의 차가운 물에서 수영을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수포로 돌아가, 1796년 7월 21일, 3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짧지만 파란만장한 삶에서 번즈는 600개 정도의 시를 썼고, 그 중에도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로는 “작별89)”, 그의 최고의 시중의 하나인 “샌터의 탬”90),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랑 받는 연애시, “붉디 붉은 장미91)” 등이 있다. 이러한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그를 국제적 숭배 대상자, 스코틀랜드적인 모든 것과 동의어, 그리고 국내외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번즈는 그의 작품에 특유의 열정을 담고 단순성을 사용한, 본질적으로 사랑의 시인이었으며, 그것이 200년 동안 계속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왔다. 농사를 지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시들은, 다음 시구가 가리키듯이, 서민들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잘 보여준다. “사람은 값으로 매겨질 수 없다./ 사람의 인격이야말로 진짜 금이다.” (“그래도 사람은 사람이다”92) 중에서). 그리고 그의 유머소질이 시를 밝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널리 공유되는 느낌을 간결하면서도, 쉽게 인상적인 시구로 표현하는 것은 그의 능력이었으며, 그것이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번즈 나이트 때에 건배를 하며 그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 같은 의식을 통해, 그의 시대에 가장 뛰어난 시인 중 한명이었으며, 서민들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투사였던, 스코틀랜드에 긍지를 가진 국가 영웅을 위해 건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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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The Author’s earnest cry and prayer
58) 가내 증류 COTTAGE STILLS
59) 위스게 바하 uisge beath
60) 구리 냄비 증류기 copper pot still
61) quart 쿼트, 액량의 단위. 영국, 캐나다에서는 2파인트(pint) 또는 약 1.14리터, 미국에서는 0.94리터
62) 웨스턴 아일스 Western Isles: 스코틀랜드 북서(北西) 난바다의 제도(諸島)(Outer Hebrides)에 있는 지역, 주도는 Stornoway
63) 당시 1파운드당 환율은 1220원이었으니, 27페니는 330원정도이다.
64) pint 파인트 – 액량・건량 단위. 영국에서는 0.568리터, 일부 다른 나라들과 미국에서는 0.473리터. 8파인트가 1갤런
65) 커크월 Kirkwal 스코틀랜드 동북쪽에 있는 Pomona 섬의 작은 도시로 Orkney 주의 수도이다..
66) 불법 스카치 위스키 Illicit Scotch
67) 1 페니는 오늘날 약 3,500원 정도. 이 가격은 다음 사이트를 참조하였다.
    1 스코틀랜드 파인트는 약 1.7L로 500ml 3병이 약간 넘는다. 위의 정보에 따르면 당시 위스키 가격을 지금 가격으로 환산하면 500ml 한병당 만원 이하인데, 현재 발렌타인 17년 500ml 한 병이 대략 10만원이 넘으니까 엄청 저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주.
68) 비츠핵 The Beatshach
69) 래더 The Ladder
70) 잭스 로드 Jock ‘s Road
71) 펀질 The Fungle
72) 하일랜드 퍼스샤이어 Highland Perthshire는 주요 5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여행을 가신다면 이쪽을 추천한다. 역주.
73) 코일형 웜 the coiled worm
74) 보니 프린스 찰리 Bonnie Prince Charlie
75) 코디얼 cordial 과일 주스로 만들어 물을 타 마시는 단 음료
76) 펀치 punch 술·설탕·우유·레몬·향료를 넣어 만드는 음료
77) 토디 toddy 독한 술에 설탕과 뜨거운 물을 넣고 때로는 향신료도 넣어 만든 술
78) 워시 wash: 위스키의 제조과정: 몰트를 잘게 분쇄 -> 발효 -> 증류 -> 숙성 -> 병입. 발효과정을 통하여 발효된 맥아는 거품은 가라앉고 8% 정도의 알콜이 생성된 죽이 되는데 이것을 워시라고 한다.
79) 대영 제국의 위스키 증류소 The Whisky Distilleries of The United Kingdom
80) 아름다운 넬 Handsome Nell
81) 엘리자베스 개비 Elizabeth Gebbie
83) 산에 피는 데이지에게 To a Mountain Daisy
84) 생쥐에게 To a Mouse
85) 오두막집의 토요일 밤 The Cotter’s Saturday Night
86) 행복한 거지 The Jolly Beggars
87) 스코틀랜드의 술 Scotch Drink’
88) 소작인의 진심어린 울음과 기도 The Author’s Earnest Cry and Prayer
89) 작별 Auld Lang Syne
90) 샌터의 탬 Tam o’Shanter. 이 시에서 커티삭(Cutty Sark)이란 위스키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18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의 한 농부인 Tam이 폭풍이 심한 늦은 저녁, 술에 거나하게 취해 말을 타고 귀가 하던 중 교회근처 공동묘지를 지나게 되었다. 그 때 울부짖는 백 파이프 소리에 호기심을 느껴 소리 나는 쪽으로 말을 몰았다. 말을 몰고 가보니, 몇 명의 늙고 추한 마녀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때 무덤 뒤에서 짧은 속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어린 마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이 절정에 오른 마녀의 춤에 감탄한 Tam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GOOD! CUTTY(짧은) SARK(속치마)!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 한 줄기 번개가 번쩍이며 화가 난 마녀들이 모두 Tam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마녀에게 잡히면 평생 마녀의 노예가 된다는 전설이 있었기에 Tam은 필사적으로 말을 몰아 강가 쪽으로 달렸다. 이때 마녀들은 흐르는 강물을 건널 수 없음을 기억한 그는 강을 거의 건너려 할 때 말의 꼬리를 붙잡혀 말의 꼬리가 뽑힌 채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때부터 커티삭은 빠른 것, 빠른 탈 것, 빠른 사람 등에 비유되어지며, 지금은 세계적인 스카치 위스키의 이름이 되기도 하였다. 커티삭의 선수상이 짧은 치마를 입고 말꼬리를 잡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91) 붉디 붉은 장미,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92) 그래도 사람은 사람이다 A Man’s a Man for A’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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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제목
출처
작자
그림
17
불법 증류시대 위스키 시음
발렌타인사
그림
18
가내 증류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
David Wilkie
그림
19
보니 프린스 찰리
wikipedia.org
Allan Ramsay
그림
20
조지 4세
wikipedia.org
Public Domain
그림
21
플러스카든 수도원
wikipedia.org
John Wright
그림
22
로버트 번즈
발렌타인사
그림
23
커티삭
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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