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세계를 향하여

제 5 장   세계를 향하여
TO THE WORLD
그림 31 덤바튼성
        유리잔에 또는 주전자에 있는 스카치 위스키를 찬양한다.
        스코틀랜드 보리가 위스키가 되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그 술을.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자”, 로버트 번즈
 
커가는 명성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조지 발렌타인은 런던에서 잡지 광고를 통해 고정 고객을 확보하였고, 블렌디드 위스키판매는 발판을 다졌다.
싱글 몰트 위스키는 개성과 정체성 측면113)에서 도메인 와인114)과 비견될 만큼 독특하다고들 하는데, 발렌타인 고급 블렌디드 위스키는 개별 싱글 몰트 위스키들을 단순 합한 것보다 더 깊고 중층적인 맛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조지는 그의 블렌디드 위스키의 성공이 폭 넓은 대중의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부드럽고, 위스키 애주가들의 관심을 끌 만큼 충분히 섬세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발렌타인 블렌디드 위스키는 가능한 한 다양한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친숙한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피트향 또는 오크향이 너무 강한 것을 거슬리지 않게 하는, 드라이하지만 너무 드라이 하지 않은 그런 부드러움, 즉 담백한 맛이었다. 또한 좋은 나무통에서 숙성하는 과정을 통하여 나오는 일종의 단맛도 있다.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발렌타인사는 글래스고 전화번호부에 5개의 서로 다른 명칭으로 실려 있었다. 국왕을 위한 와인상인, 올드 스카치 위스키 수출업자, 스카치 위스키 상회, 와인 수입업자 그리고 하바나 시가 수입업자.
1880년 이래 수출회사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글래스고의 발렌타인사는 조지 발렌타인 2세와 그의 형 아치볼드의 아들인 조지 발렌타인 3세의 지휘 아래 사세를 확장하였다. 창업자의 아들과 손자인 두 명의 조지는 품위 있는 전통에 따라 사업을 하는 교양 있는 신사들이었는데 영국의 와인과 증류주 업체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뉴에이지115)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업방식은 19 세기적인 공손한 예의범절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문화적, 예술적 그리고 사회적 환경이 번성하고 있는 국제도시 글래스고에서 회사의 입지를 탄탄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발렌타인사가 국내외에서 이루어온 영향력은 점차 경영진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창업자의 아들인 조지 2세는 69살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의 조카인 조지 3세는 열심히 일하여서 글래스고 산업계에 회사의 영향력을 확립하였지만, 46살이 되었을 때, 국제적 도약을 위한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해야 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것은 발렌타인 회사와 발렌타인 가문과의 결별이었으며,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이었다. 1919년, 발렌타인 가문은, 높은 경쟁력이 있는 위스키 동업자인 제임스 버클리와 알에이 맥킨레이116)의 호의적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블렌디드 위스키 수출에 있어서 발렌타인이란 일개 가족기업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환골탈태시키기 위한 업무에 착수하였다.
버클리와 맥킨레이 시대
아마 새로운 주인이 보았던 가능성이 가장 큰 영역은, 발렌타인 회사가 제품판매는 잘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브랜드 명성을 효과적으로 세우고 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렌타인사는 주요 블렌디드 위스키 업체로 발전한 일개 가족 경영 시대에서 발렌타인 브랜드를 국제적으로 확고히 하는 활발한 수출과 마케팅 활동을 하는 시대로 나아갔다.
버클리와 맥킨레이는 완벽하게 손발이 맞는 사업동반자였다. 버클리는 그 자신이 경영하는 위스키 회사를 통해 이미 미국 시장과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일랜드에 있는 벤린즈 몰트 증류소에서 주급 30 펜스의 사환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젊었을 때 소매를 걷어 부치고 사업 전문 지식을 습득하였으며, 곧 스카치 위스키 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대조적으로, 맥킨레이는 단호한 성격도 독선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그는 비싼 양복과 수제 실크 넥타이로 멋을 내는 고상한 성격의 인물로, 와인 전문가로서 그리고 위스키에 대해 놀랄만한 후각 능력을 가진 전문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발렌타인사 인수에 있어서 전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몇 년 전에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가 중요한 전시 규제를 도입한 것이었다. 법에 의하면 이제부터 모든 스카치 위스키를 최소 3년 이상 숙성시켜야만 했다. 그 규제는 스카치 위스키의 격을 높였으며, 블렌딩, 상표 그리고 숙성 등 위스키 사업 전반에 걸쳐서, 특히 점차 스카치 위스키를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술로 보는 미국시장에서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발렌타인사를 인수한지 수개월 후에 버클리와 맥킨레이는 최대 시련에 직면하였는데, 그들의 최대시장인 북미시장에서 볼스테드법117)이란 금주법이 통과되었다. 고객은 그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를 열망하고, 동시에 정부는 단호하게 주류 판매를 금지하는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위스키 회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주법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장은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통업자들은 위스키를 구매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도덕성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들을 하였다. 기묘하게도 아이리쉬 위스키 증류업자들은 도덕적 관점을 가지라는 교회의 압력에 굴복하였고, 그 결과 스카치 위스키에게 미국 시장 주도권을 내 주었다.
제임스 버클리와 같은 몇 몇 스코틀랜드 사업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종종 행운을 움켜잡는 특이한 매력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금주법 동안 위험한 거래에 대해서 그는 딱히 말한 적이 없었다.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오직 하나의 단서를 흘린 적이 있는데, 발블레어 증류소 관리자 빌 크레이그가 미국에서 위스키를 하역할 때 싸움이나 총격이 있었다는 소문의 진위를 물었을 때였다. 버클리는 아무 말도 없이 재킷과 셔츠를 벗고, 등을 가로질러 나 있는 무수한 상처들을 보여 주었다.
캐나다와 서인도 제도에서 접촉을 하여, 버클리는 맨해튼 웨스트 52 번가에 있는 유명한 “21 클럽”을 본거지로 하는 잭 클린들러와 찰리 번즈에게 위스키를 공급하는 유통망을 수립할 수 있었다. 스카치 위스키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있던 미국은, 그러나 발렌타인 위스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인은 호밀118)로 만든 거칠게 쏘는 타는 듯한 맛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들이 해야 할 도전은 그들에게 고급 위스키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것이었다. 입안을 태우는 듯한 맛이 아니라 입안을 녹이는 듯한 맛을 지닌 위스키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미국인에게 진정한 위스키 맛을 알리려는 재교육 활동을 시작하였다. 제임스 버클리는 모리타니아호와 퀸 메리 호와 같은, 영국과 뉴욕을 왕복하는 대형 정기 선박의 단골 승객이 되었고, 발렌타인은 식당에서 친숙한 고정메뉴가 되었다. 부유한 국제선 승객들이 발렌타인 제품을 받아들이자 미국시장 판매도 원활해졌고, 그리하여 가장 많이 팔리는 브랜드의 하나로 두각을 나타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자, 클린들러와 번즈는 적법절차를 밟아 상류층을 위한 식료품과 위스키 수입회사(회사명, 21 브랜즈)를 차렸으며, 발렌타인사의 대리점이 되었다. 그들의 확고한 열정 덕분에 발렌타인 제품은 미국시장을 석권하고 진정한 국제적 브랜드로써 명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발렌타인 제품을 판매하기 위하여 짧은 기간 동안 잘 생긴 영국 젊은이를 고용하였다. 영화계에서 휴식을 취하고자 하였던 데이비드 니븐은 사실 그 일이 맞지는 않았다. 몇 년 후,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달의 풍선”119)에서 발렌타인을 팔던 짧은 시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첫 번째 날, 클린들러는 나를 FBI 본부로 보내 지문을 찍게 하고, 목둘레에 숫자를 붙인 사진도 찍게 했습니다. 그날 21 회사에 그 사진을 내다 걸었는데, 사진 밑에, 우리 회사의 처음이자 최악의 영업사원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금주법 기간동안 버클리의 가장 친구이자 귀중한 거래 상대중의 한명은 해리 해치로, 토론토의 사업가이면서 캐나다 위스키 증류 회사 “하이램 워커 구더햄 & 워트120)” 사의 사장이었다. 미국 시장에서 주문이 급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경제 불황으로 회사 경영은 악화 일로였다. 대부분의 회사가 영향을 받았으며, 1933년에는 단지 15개 증류소만이 가동되고 있었다.
버클리와 맥킨레이가 발렌타인 가문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이램 워커사도 금주법 종언 후에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였고 1935년에 회사를 인수하였다. 조지 발렌타인과 그의 아들들의 지휘아래 블렌딩 예술을 발전시켰고, 버클리와 맥킨레이가 국제적으로 성장시킨 뒤, 이제 발렌타인 제품은 미래를 보장하는 성장과 투자의 시대로 들어갔다.
하이램 워커 시대
하이램 워커사는 스카치 위스키 증류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보여 주었다. 캐나다 사람들은 발렌타인 위스키 제조에 있어서 필수적인 몰트 위스키 증류소를 인수하기 위하여 서둘렀다. 그들은 현명하게 스카치 위스키 제조 사업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맡기고 위스키 생산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모든 수익은 1937년 스코틀랜드에 설립된 하이램 워커사에 재투자하였다.
해리 해치는 잭 버클리에게 좋은 몰트 위스키 증류소를 찾는 일을 위임하였다. 잭 버클리가 1936년에 밀튼더프와 글렌버기 증류소를 인수하여 바로 확장 계획에 착수하였을 때, 해리 해치는 또 다른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발렌타인 블렌디드 위스키는 몰트 위스키 재고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몰트 증류소 구입으로 한층 더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레인 위스키는 경쟁사로부터 구입해야만 했다. 잭 버클리가 몰트 위스키 증류소를 인수하는 동안, 해리 해치는 덤바튼 리벤강 강둑에 있는 옛 조선소 터에 유럽 최대의 그레인 증류소를 세울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클라이드 만에서 73미터 솟아 있는 덤바튼 암반은 고대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본거지였으며, 5세기 이후에 요새화되었다. 지금은 발렌타인사의 거점이지만, 예전에는 조선소 주변에 옹기 종기 모여 형성된 작은 도시였던 덤바튼은 1222년에 왕립 자치 도시로 조성되었고, 유통 시장 도시로서 글래스고와 겨루고 있었다.
역사가 깃들인 장소에 발렌타인사가 뿌리를 내리기에 좋을 것 같았다. 1937년 건설이 시작되면서 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레인 위스키 증류소에서 일을 하였다. 부지 내에 포함된 시설물로는 소규모 몰트 증류소인 인버리벤, 거대한 저장 창고 그리고 병입과 블렌딩 공장 등이었다.
경영과 공장의 통합은 발렌타인 본사가 덤바튼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여기에서 조지 로버트슨이 블렌딩 작업을 총지휘하였다. 이런 확장 기간 동안에도, 회사는 이 지역에서 최고의 장인만을 채용하여 발렌타인의 높은 품질 수준을 계속 유지하였다.
조지 발렌타인이 처음 블렌디드 위스키를 실험한 글래스고 유니언 거리 100번에 있는 우아한 가게는 커튼을 내렸고, 스카치 위스키 역사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확장
덤바튼 공장이 공식적으로 문을 연 1938년 9월 28일, 영국 해군에 전쟁 대비 동원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발렌타인사는 전쟁시기의 궁핍, 그리고 식량과 연료 위기에서 살아남아, 전 세계에 스카치 위스키의 기준을 세웠다.
스코틀랜드 하이램 워커사는 계속하여 몰트 위스키 증류소들을 인수하였다. 하일랜드 가장자리에 있는 글렌카담 증류소, 강한 바람이 부는 오크니 섬의 스카파 증류소 그리고 발블레어 증류소. 그 증류소들의 전문기술은 위스키 사업을 개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시기는 통합의 시대였다. 회사는 안정적인 그레인 공급을 위하여 로버트 킬고어 회사에 투자하였고, 덤바튼 덤벅에 위스키 4백만 갤런(약 1 만 8,000 킬로리터)을 숙성할 수 있는 저장고를 만들었다.
주목할 만한 비전과 과감한 확장의 시대에 발렌타인사의 매출은 기록적인 수준으로 증가하였다. 1977년 덤바튼에 멀지 않은 킬마리드에 새로운 복합공장을 열었다. 4,000만병 분의 블렌딩 생산력을 가진 유럽 최첨단 블렌딩 공장이었다.  1982년에는 최첨단 보틀링 공장이 문을 열었다.
연간 1억병 이상을 생산할 수 있는 킬마리드 보틀링 공장의 총 비용은 4,300만 파운드였다. 발렌타인사 사장 앨리스테어 커닝햄이 그 계획을 이사회에서 발표하여 승인을 수 시간 만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발렌타인사에 대한 하이램 워커의 신뢰였다.
1987년 스코틀랜드 하이램 워커사는 얼라이드 라이온스121)사와 합병하여, 발렌타인사는 위스키 티쳐스122), 셰리주 하비123), 포트와인 콕번124), 코냑 꾸브와제125), 리큐어 티아 마리아126) 등 유명 상표를 보유한 일류 기업 산하에 들어갔다. 새로운 국면은 경영 스타일에서도 변화를 가져 왔다. 마케팅과 유통에서 확장이 계속되었고, 글렌드로낙, 아드모어, 그리고 라프로익과 같은 더 많은 몰트 증류소가 회사 안으로 들어왔다.
1988년, 증류주 전문회사 얼라이드 디스틸러스127)가 경영을 시작하였는데, 규모면에서 세계에서 두 번째 위스키 회사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본사를 둔 유일한 대기업이었다. 하이램 워커사에 의해 건설된 덤바튼 본사는 곡물에서 병에 담겨지기까지의 위스키 제조공정을 관리한다. 그것을 위하여 계열사이자 맥아회사인 킬고어사와, 13개의 몰트 증류소, 2개의 그레인 증류소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킬마리드에 위스키 업계에서는 최첨단인 보틀링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모든 얼라이드(ADL) 브랜드는 세계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발렌타인 브랜드이다. 오늘날 발렌타인 제품과 발렌타인 17년산은 얼라이드 도멕사의 주력 상품으로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고 있다. 얼라이드 도멕은 연간 850만 상자 이상의 위스키를 판매하고 있으며, 그 중 80%는 해외에서 팔리고 있다.
1994년, 얼라이드는 수출부문에서 퀸즈 어워드를 수상하였으며, 싱글 몰트 위스키 브랜드 라프로익128)으로 왕실 납품 증명서를 받은 최초의 위스키 회사이기도 하였다.129)
* 위스키를 가득히 WHISKY GALORE

 

그림 32 1949년 영화 포스터

전시 몇 년 동안, 발렌타인 위스키를 실은 수송대는 뉴욕에 있는 21 브랜드 회사에 귀중한 화물을 배송하기 위해서는 독일 유보트의 호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때로 가장 큰 위험은 대서양 전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박들을 스코틀랜드 바다 속으로 침몰시키는 아우터 헤브리디스 제도의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1941년 2월, 리버풀에서 뉴올리언스, 킨스톤, 자메이카를 경유하는 위스키를 적재한 에스에스 폴리티션호130)는 에리스케이섬131)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맹렬한 강풍으로 좌초하였다. 그 배에는 264,750병에 이르는 위스키가 실려 있었으며, 상당수가 발렌타인 제품이었다.
승무원들을 도와주기 위해 해안으로 달려간 섬 주민들은 자신들의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화물은 행방불명되었고 결코 다시 볼 수 없었다. 섬 주민 몇몇은 체포되었고, 일부는 기소되었다.
섬 주민들의 공헌은 콤튼 맥켄지132)의 소설 “위스키를 가득히”에 영감을 주었고, 그 이야기에 기초하여 나중에 영화화되었다. 오늘날 다이버들은 배가 좌초한 해저에서 지금까지도 가끔 그 병을 찾곤 한다. 일부는 경매에서 ₤1,000까지 팔리기도 할 정도로, 전 세계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대단한 관심을 받고 있다.

 

그림 33 2010년 8월 에딘버러에서 경매에 나온 발렌타인
여기까지의 영어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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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제임스 버클리 James Barclay, 알에이 맥킨레이 R.A. McKinlay
117) 볼스테드법 Volstead Act
118) Rye Whiskey 라이 위스키 – 호밀로 만든 위스키. 미국 법에 의하면 호밀 함량이 51% 이상이어야 한다. 싱글 몰트 위스키는 전부 보리 맥아, 버번 위스키는 옥수수가 주원료이다. 라이 위스키는 지역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켄터키 라이와 로렌스버그 라이이다.
119) 달의 풍선 The Moon’s A Balloon
120) 하이램 워커 구더햄 & 워트 Hiram Walker Gooderham & Worts
121) 얼라이드 라이온스 Allied Lyons
122) 티쳐스 Teacher’s
123) 하비 Harvey
124) 콕번 Cockburn
125) 꾸브와제 Courvoisier
126) 티아 마리아 Tia Maria
127) 얼라이드 디스틸러스 Allied Distillers
128) 라프로익 Laphroaig
129) 현재 발렌타인은 프랑스 회사 페르노리카 계열사이다. 2005년 영국 얼라이드 도멕과 프랑스 페르노리카가 합병하였다. 현재 킬마리드 공장은 시바스리갈회사 산하에 있으며, 발렌타인 회사의 주소가 바로 여기이다.  George Ballantine & Son Limited, Kilmalid, Stirling Road Dumbarton Dunbartonshire G82 2SS
130) 에스에스 폴리티션호 SS Politician
131) 에리스케이 Eriskay
132) 콤튼 맥켄지 Compton Mackenz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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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FA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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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 발렌타인 병 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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