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발렌타인 17년 탄생

제 6 장   발렌타인 17년 탄생
THE CREATION OF 17 YEARS OLD
그림 34 전통과 품질
 아 당신, 나의 음악이여! 좋고 오랜 스코틀랜드 술이여!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자”, 로버트 번즈
스카치 위스키의 진화
품질에서 결함을 찾아내는 선대 마스터 블렌더 잭 가우디의 능력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 중의 하나는 몇 년 전 몰트 위스키 샘플을 개봉하였을 때 일어났다. 그 샘플은 발렌타인사와 거래를 희망하는 외부 회사에서 보내 온 것이었다. 잭은 소량을 붓고, 그의 유명한 코를 알맞게 튤립잔에 갖다 대었다.
몇 초 동안 냄새를 맡은 후에, 안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 몰트 위스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떤 풍미가 있었던 것이다.
잭은 샘플을 보낸 증류소 관리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위스키에는 철분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런 일은 정말 있을 수 없다고, 관리자는 격분하여 그것을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잭은 그 위스키는 2등품이라며 확고부동하였다. 어쨌든 잭은 주문을 취소하였고, 그 위스키의 맛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지 어떤지는 의견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면서 원만하게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얼마 후, 그 관리자가 잭에게 전화를 걸어, 황송한 목소리로 정말로 그의 유명한 코가 맞았다고 인정하였다. 위스키 대형 통을 청소할 때에, 당황스럽게도 지난 번 유지 작업을 실시하고 난 후, 증류소 일꾼이 대형 통 안에 사다리를 그대로 남겨둔 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쇠못을 박은 나무 사다리였던 것이다.
창업 초기부터, 발렌타인의 명성은 엄격한 품질을 추구하는 블렌더에 의해 형성되고 인도되어 왔다. 창업자 조지 발렌타인과 그의 아들들로부터, 제임스 버클리와 알에이 맥킨레이 그리고 그들의 지식을 여러 해에 걸쳐 전수하는 오래된 블렌더 계보.
숙성과정의 현묘함 때문에, 어떤 위스키는 다른 위스키보다 먼저 숙성되곤 한다. 증류주가 나무와 상호작용하면서, 각각의 몰트 위스키는 최적 숙성년도에 도달한다. 최적 숙성년도에 도달하여 균형을 이루는 시점을 넘어서서는 현저히 변화하거나 개선되는 활동은 멈춘다. 신제품 개발은 최적의 몰트 위스키를 판별하여서 향후 몇 년 동안 얼마큼 필요한지를 예측하는 최고 난이도 업무도 포함한다. 모처럼 완벽한 신제품을 개발하였는데 몇 년 후 주요 몰트 위스키가 품귀 된다면 후회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버클리와 맥킨레이가 발렌타인 가문으로부터 회사를 인수하였을 때 저장한 몰트 위스키는 금주법 시대와 세계사의 격변기 동안 오크통 안에서 잠을 자며 숙성되었다. 하이램 워커사가 경영을 한 1930년대에는 균형된 풍미를 지닌 위스키가 되었다. 게다가 새로 인수한 밀튼더프와 글렌버기 증류소에서 생산한 프리미엄 몰트는 최상급으로 숙성되었다고 인정되었다.
이에 덧붙여 하이램 워커사 포트폴리오내에 있는 몇몇 몰트 위스키는 놀랄만한 숙성도에 도달하였고, 심지어 어떤 것은 17년도 숙성하지 않은 어린 몰트 위스키 임에도 위스키의 가장 완벽한 예로 간주될 정도로 맛이 탁월하였다.
위스키의 탁월한 감정가 제임스 버클리는 궁극의 블렌디드 위스키를 개발할 더 할 나위없는 시기라고 판단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혜를 겸비한 위스키 전문가를 모았다. 그 가운데에는 인생의 대부분을 위스키 연구에 몰두해 온 친구이자 동료인 제임스 혼, 발렌타인 역사에 있어서 하이램 워커 시대의 초대 마스터 블렌더가 된 조지 로버트슨이 있었다. 버클리의 누이동생과 결혼한 조지는 고객 서비스 부서에서 일하였지만, 그 부서를 떠나 밑바닥에서부터 위스키 제조사업을 배웠다. 여러 증류소에서 블렌딩 기술을 습득하였고, 계속하여 어마어마한 지식을 축척해 갔다.
3인조는 참나무로 만든 조지 로버트슨의 블렌딩실에서 모여 샘플을 감식하였다. 각 몰트가 완벽함에 도달하는 년산을 조심스럽게 검토한 후에, 조지는 최적의 년산은 최소한 17년 이상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임스 버클리, 그의 동료 제임스 혼 그리고 하이램 워커 경영진은 그의 판단에 동의하였다. 1937년 샘플들이 만들어졌고, 사내 전문가들은 칭송을 하였다. 더 스카치 발렌타인 17년이 탄생하였다.
60년 전 위스키 대형통에서 블렌딩한 발렌타인 17년의 레시피는 아주 신중하게 보호되고 있는데, 그 이후로 크게 변화하지 않은 채 여전히 그대로이다. 발렌타인 17년의 지문을 만든 조지 로버트슨의 독창적인 몰트 위스키 선정은 스카치 위스키 협회가 “발렌타인의 거대한 일곱”이라고 기술할 정도로 엘리트 그룹이었다. 그 일곱개 몰트 위스키는,  쏘는 맛인 아일레이 섬의 아드벡 증류소, 메인랜드섬 최북단에 있는 펄트니 증류소, 오크니섬에서 나오는 식후용 몰트 위스키 스카파 증류소, 크리미한 맛 글렌카담 증류소, 향신료 맛이 나는 발브레어 증류소, 향긋한 꽃내음의 밀튼더프 증류소 그리고 여름풍미(잔디)를 느낄 수 있는 글렌버기 증류소 등이다.
이러한 주요 몰트 위스키들은 스코틀랜드의 역사, 풍부한 자연 경관 그리고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기술을 기념하는 각 지방의 몰트 위스키 중에서 선정되었다. 그러한 놀라운 몰트 위스키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발렌타인 17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드럽고 우아한 맛을 가지고 있다.
그림 35 발렌타인의 거대한 일곱

1938년 말 생산라인을 떠난 첫 번째 소량의 화물은 미국 “21 브랜드” 회사와 미국 버진 아일랜드를 향해 출하되었다. 버클리와 맥킨레이의 노력과 “21 브랜드” 회사의 클린들러와 번즈의 후원 덕분에, 발렌타인은 취향과 세련됨의 상징으로,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제품은 매우 독특하여서 정말 달랐습니다. 시장 어느 곳에서도 발렌타인 17년과 같은 블렌디드 위스키는 없었습니다. 정말 특별하였습니다.” 라고 발렌타인사 브랜드 마케팅 부서 리차드 푸뎁햇은 말한다.
발렌타인 17년은 매우 특별하다고 인정되었기에 모든 면에서 다르게 보여야만 했다. 발렌타인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스타일로 팩키지를 디자인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병은 녹색으로 결정하였는데, 천편일률적으로 갈색 병을 사용하던 시대에, 발렌타인 제품을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계획적인 선택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병 측면이 대부분의 위스키 병과 같이 똑바르지 않고 살짝 가늘어 집니다. 목은 살짝 부풀어 올라 몰트 위스키의 포트스틸을 연상시킵니다. 아마 그 당시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은 포틸 스틸에서 작업하는 증류기술자의 장인정신을 기리려고 했을 겁니다. 지금까지 많은 종류의 발렌타인 제품이 있었지만 병 형태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라고 리차드는 설명한다.
전시
1939년 세계는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필수적인 보리 공급과 새로 만든 몰트 위스키 재고는 바짝 말랐다. 장기간 숙성된 원액으로 만드는 발렌타인 17년은 비록 계속 생산되어 미국으로 출하되었지만, 심각한 재고부족 사태가 벌어질 것은 분명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정부는 위스키에 대해 과세하였고, 그 때문에 가격이 병당 14% 상승하였다. 전력 증강을 위해 달러 수입이 절실한 정부는 해외 판매를 늘리도록 위스키 회사를 압박하였다.
발렌타인사는 선두 수출업자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블렌디드 위스키를 실은 화물선은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미국으로 출항하였다. 세금 망치를 맞은 국내 매출, 곡물 부족, 군대에 끌려간 사람들 등으로 위스키 생산은 꼬꾸라졌다. 1942년 또 다른 증세조치로 병당 60%까지 가격이 상승하였다.
2년간, 한 병의 위스키도 덤바튼에서 생산되지 않았다. 단지 남아있는 발렌타인 재고를 수출할 때에 해군성은 증류소 대지를, 식품성은 창고를 징발하였다.
가장 부드러운 위스키로 인정을 받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발렌타인 17의 수요는 엄청났다. 미국과 캐나다로 공급을 겨우겨우 이어나가기 위해, 하이램 워커사는 발렌타인 28년과 발렌타인 31년 재고로 묘기를 부려야만 했다. 몇 년 동안, 17년은 엄격하게 배급해야만 하였고, 때로는 극심한 부족에 시달렸다.
회생
평화와 전후 시대로 들어서자 국제 경제는 빈곤에서 풍요로 전환하였고, 동시에 발렌타인 17년에게는 호경기가 찾아왔다.
그들만의 유서 깊은 증류주 산업을 가진 일본 사람들은 위스키에 대한 지식이 매우 풍부하였고, 특히 국제적인 위스키 연산 브랜드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한 관심은 1950년 초반 시작되었는데, 해외 출장을 간 일본 비즈니스맨들이 발렌타인 17년에서 황홀감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발렌타인을 국내로 가지고 갔으며, 그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발렌타인 17년이 인기를 끈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발렌타인 17년의 매우 정교한 맛과 미묘한 중층적인 풍미가, 좋은 음식물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는 일본인의 미각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몇몇 세계적인 수준의 위스키들과 같이 발렌타인 17년의 명성도 사람들이 그 품질을 알아감에 따라 서서히 높아졌다. 1952년 일본에 첫 번째 발렌타인 17년이 상륙하였고, 그 진가를 아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 명성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도쿄 진출은 하나의 사건이었는데, 우연히도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이 있는 겹경사였기 때문이다.
그림 36 1980년대 광고

일본에서 그 새로운 위스키는 가장 독특한 블렌디드 위스키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비싼 위스키였다. “처음부터 광고는 썰렁할 정도로 단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품이 모든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단지 하나의 발렌타인이 있고, 그 이상 사족을 달 게 없는 거죠.” 라고 리차드 푸뎁햇은 설명한다.

일본 경영자들은 발렌타인 블렌더가 발렌타인 17년에서 달성하고자 추구한 것을 알아보았다. 더 스카치의 명성은 거의 품질 혼자 힘으로 확산되었다.
고급 위스키의 진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에게 발렌타인 17년이 인기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어디서나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술 마시는 방법은 나라마다 다르다. 어느 나라 사람들은 아무 것도 타지 않는 위스키를 선호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소량의 물을, 또는 일본 사람들같이  얼음과 함께 소량의 물을 넣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발렌타인 17년은 국제적인 생활방식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 있다.
“정말 좋은 위스키만이 맛을 떨어뜨리지 않고 그만큼 적응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해외무역부서 임원인 헥터 맥클레넌은 말한다.
여기까지의 영어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 스코틀랜드 그리고 스카치 위스키
839            스코틀랜드 초대왕, 케네스 맥알핀
11세기          데이비드 1세가 상업과 농업을 장려, 은화 도입, 교육을 촉진하기 위해 수도원을 세우는 계몽주의 시대.
13세기          영국 에드워드1세 스코틀랜드 침공 – 모든 스코틀랜드 왕이 대관식 때 사용하였던 스쿤석133)을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옴. 운명의 돌이라고도 불리는 스쿤석은 9세기경에 중동에서 스코틀랜드로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신성한 사암 유물이다.
1314   베넉번 전투. 로버트 브루스 잉글랜드에게 승리.
1494   수도사 코어가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위스키에 대한 최초 기록물
1488-1513      제임스 4세 통치 시기 – 성 앤드루 대학, 글래스고 대학 그리고 에버딘 대학등 3개의 대학이 세워짐 – 예술, 문학 그리고 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
1505   제임스 4세, 에딘버러에 있는 이발사를 겸한 외과의사들에게 아쿠아비테를 증류할 수 있는 권리 승인. 위스키는 치유 약효가 있다고 여겨져서 신체를 책임지고 있는 외과의사들은 위스키 제조를 통솔.
1513   플로든 전투. 잉글랜드에게 치명적인 패배. 1만명 이상 스코틀랜드인 전사. 스코틀랜드인에게 너무 잊을 수 없는 타격.
1542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태어난 지 6일째 되는 날 왕위 계승. 신망을 받지 못해 후에 살해된 단리 경과134) 결혼. 보스웰 백작과 결혼하나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란 유발. 잉글랜드로 망명. 엘리자베스1세에 의해 18년 동안 유폐, 그리고 처형됨.
1603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됨.
1644   처음으로 위스키에 많은 소비세 과세. 찰스 1세의 왕당파와 대항하는 영국 의회파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스코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 핀트(1/3 갤런)당 2실링 8펜스(13펜스) 세금 부과.
1707   연방법.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하나의 의회, 하나의 국기, 한 명의 군주하에  연합. 단일 외교 정책과 경제정책의 실리적인 이유 때문, 그러나 반란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근접 통제하기 위한 것도 또 하나의 사실.
1715   연방을 반대하고 스코틀랜드 왕정을 지지하는 재커바이트 반란. 잉글랜드에 의해 제압.
1736   에딘버러 위스키 세금 폭동. 포티어스 대위 군중에 발사.
1745   보니 프린스 찰리, 영국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군을 이끌기 위해 망명지에서 귀국.
1746   스코틀랜드 컬로든 전투에서 패배. 찰리, 금지된 타탄을 입고 프랑스로 탈출.
1750   진 Gin 법령, 잉글랜드에서 과음으로 인한 폐해 때문에 시행, 진 소비량, 연간 8백만 갤런에서 2백만 갤런으로 감소. 위스키 판매 호황.
1786   증류소 법 도입, 불공정한 면허 제도. 하일랜드에서 광범위하게 불법 증류 발생.
1793-1803      위스키 세금 10년 동안 9파운드에서 162파운드로 치솟다. 불법 증류는 소작료를 지불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1822   조지 4세, 불법 증류와 스코틀랜드 문화에 재갈을 물리는 정책 실패 후 가교를 만들기 위해 스코틀랜드 방문. 평화를 바라는 상징으로 타탄을 착용하고, 불법 위스키 글렌리벳을 마심.
1823   불법 위스키 증류를 종식시키고자 새로운 법령 도입. 합당한 수준인 연간 10파운드 면허세. 치외법권에 있는 증류업자와 밀수업자를 합법적 사업제도로 들어오게 함. 불법 증류 시대 종언.
1827   조지 발렌타인 도제수업을 졸업하고 에딘버러에 소규모 식료품점 개장.
1831   아이네아스 코피, 연속하여 그레인 위스키를 증류할 수 있는 페이턴트 스틸 개발.
1836   조지 발렌타인 와인과 증류주 판매 시작.
1853   앤드류 어셔 처음으로 배티드 몰트 위스키135) 생산.
1858-66         필록세라 전염병 프랑스 포도밭 강타, 브랜디 생산 궤멸. 위스키 판매 호황.
1863   몰트와 그레인으로 만든 첫 번째 블렌디드 위스키.
1869   조지 발렌타인 에딘버러와 글래스고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위스키 블렌더로 전향.
1891   조지 발렌타인 귀천. 고급 위스키 분야에서 특화한 거대 국제적 회사를 수립.
1895   빅토리아 여왕, 발렌타인 회사에 왕실 조달 허가증 수여.
1908   왕립위원회, 그레인과 몰트를 섞은 블렌디드 위스키도 스카치 위스키로 명기할 수 있다 라고 판결을 내림.
1916   위스키는 의무적으로 최소한 3년 이상 숙성되어야 한다.
1919   버클리와 맥킨레이 발렌타인 인수.
1920-33         미국 금주법.
1930년대       발렌타인 17년산 탄생.
1935   하이램 워커, 버클리와 맥킨레이로부터 발렌타인사 인수.
1936   발렌타인사 글렌버기 증류소와 밀튼더프 증류소 인수.
1938   덤바튼에 발렌타인 블렌디드 위스키 생산을 하기 위한 3백만 파운드짜리 그레인 위스키 증류소 개장.
1939-45         세계 2차 대전 – 4백 5십만 갤런의 위스키가 폭격으로 파괴됨. 새로운 인버리벤 몰트 증류소에서 위스키 생산.
1951   발렌타인 제품을 위하여 로버트 킬고어 회사 인수
1953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
1954   발렌타인 제품을 위하여 글렌카담 몰트 증류소 그리고 스카파 몰트 증류소 인수.
1958   톨모어 증류소 개장. 20세기에 건립된 첫 번째 새로운 하일랜드 증류소.
1960   글렌드로낙 몰트 증류소와 아드모어 몰트 증류소 인수
1970   발블레어 몰트 증류소 인수.
1976   아드벡 증류소 인수.
1977   킬마리드에 발렌타인 블렌딩 공장 개장.
1982   킬마리드에 보틀링 공장 개장.
1986   발렌타인,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3대 위스키에 진입. 수출 달성으로 여왕상 수상.
1987   하이램 워커사와 얼라이드 라이온스사의 자회사인 얼라이드 비트널사와 합병.
1988   얼라이드 디스틸러리 회사 설립
1990   얼라이드 디스틸러리 회사, 라프로익, 글렌토커스 그리고 임페리얼 증류소 인수.
1991   업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관리 정보 체계를 갖추어서, 얼라이드 디스틸러리사 위스키 회사 최초 영국 표준 규격 승인 받음.
1994   얼라이드 디스틸러리, 수출 달성으로 퀸즈 어워드 수상. 라프로익, 왕실 조달 허가증을 받은 최초의 몰트 위스키 회사.
1995   얼라이드 라이언스, 스페인 거대 주류 회사 도멕 인수. 얼라이드 도멕 설립
2005136)        영국 얼라이드 도멕과 프랑스 페르노리카 합병.
———————————
133) 스쿤석 the Stone of Scone – 스코틀랜드 왕이 즉위했을 때에 앉았던 돌. 현재는 Westminster 사원의 대관식용 옥좌 밑에 놓여 있다.
134) 단리 Lord Henry Stewart or Stuart (1545-67): 스코틀랜드의 귀족; 스코틀랜드 여왕 Mary의 두번째 남편으로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 James I의 아버지.
135) Vatted malt whisky – 때로는 용어 때문에 혼동. 간단히 말하면 블렌디드 위스키는 몰트와 그레인을 섞어 만든 것이고, 배티드 위스키는 몰트 위스키로만 섞어 만든 것이다. 그게 그거 같지만 자존심 강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싸구려 그레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싫었던 모양.
136) 역자 새로 추가.
——————–
그림 출처
제목
출처
작자
그림
34
발렌타인 전통과 품질
발렌타인사
그림
35
발렌타인의 거대한 일곱
발렌타인사
그림
36
1980년대 광고
발렌타인사

Powered by BetterDo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