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거창하게, 넓게, 거대하게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눈 앞의 문제보다는,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 가치와 무가치함을 생각한다. 둘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이슈가 아닌, 모두 없음(무)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을 앞둔다면, 두려움에 떨며 거부할 것인가? 체념할 것인가? 존재의 무의미함이 증명된다면, 죽음으로 향할 것인가, 그 상태로 살아갈 것인가, 무가치함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일상을 영위해 나갈 것인가. 생명, 존재, 가치의 있음과 없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충분히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 한 사람이다. 능력도 없을 뿐더러 노력하지도 않는다. 정확히는 노력이 필요한 방향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이다.
죽음, 그러니까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이들이 많을까? 분명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문득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찾을 수 없다. 어느 곳에서도 그런 내색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한다. 다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대나무 숲에서 혼자 외치고 있다.
경계에 있다. 살고 싶기도 하지만, 살아내고 싶지 않기도 한, 매우 가늘지만 끝없이 펼쳐진 경계선 위를 수십년째 걷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발자국씩 내딛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둬야할까? 솔직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죽음의 낭떨어지로 내던져지든, 삶이라는 거대한 산을 힘겹게 올라가든 확실하게 선택하는 것이 좋을텐데, 아니 선택할 기력도 없으니 누군가의 선택에 따르고 싶다.
삶의 언덕을 오르기 위해 노력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오히려 죽음과 더 가까웠음에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매일 밤이 두려웠다. 내일이 오지 않을까봐. 동시에 잠 들기전 현관문의 잠금 장치는 풀렀다. 혹시 모르니까. 문을 부시는 수고까지 하면서 집안에 들어와 나의 마지막 존재가 발견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죽어서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까? 동시에 나의 위치를 동생에게 공유하였다. 굳이 어디있는지 애쓰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이 역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웃긴다. 무존재함의 슬픔을 전해주기 위함이 아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니. 하지만 그 슬픔도 ‘폐’에 포함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