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에 올라 추억을 곱씹으며
한라산 다녀온 후로 등산감각을 놓지 않기 위해 꾸준히 동네 뒷산 봉재산을 오르고 있다. 높지 않은 평범한 동네 뒷산이지만 꽤나 넓어서 코스를 다 돌면 2시간가량 소요되기도 하다.
오늘은 오랜만에 화창한 날씨다. 여름의 화창함은 상쾌보다 불쾌지수가 높다는 의미다. 팔에 토시를 하고, 햇빛 가리게를 부착할 수 있는 모자를 쓴다. 그전에 땀이 많은 체질상 헤드밴드는 필수. 안 그럼 얼굴을 타고 땀 줄기가 족히 수십 개는 흘러내린다. 여름이 힘든 이유.
어제 끓여놓은 우엉차를 병에 담고, 혹옥시 모르니 똑딱이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준다. 이것도 운동이니 귀걸이형 이어폰을 걸고, 요즘 부쩍 관심이 높은 철학분야의 책 이야기를 재생시킨 후 집을 나선다.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디디니 몰아치는 후덥지근함과 답답함에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완전 무장을 해체하는 게 더 귀찮으니 빠른 걸음으로 산을 향해 걸었다.
숲이 우거진 산이라 그늘이 많아 뜨거운 햇살은 피할 수 있지만, 첫 코스인 100개가 넘는 계단은 튼튼한 허벅지를 믿고 빠른 걸음으로 올라간다. 사실 이 산에서 힘든 구간은 이 계단뿐이기도 하고, 나름 꾸준한 운동 덕에 난이도는 낮아지고,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뿌듯하다.
이 날씨에 사람이 없겠지 하며, 내리막을 빠른 걸음으로 총총 뛰어가는 사이에도 많은 이들이 나처럼 얼굴을 가리고, 때로는 양산을 쓰고 트래킹을 하고 계신다.
강아지를 끌고 오신 분, 트레일러닝 하시는 분 사이에 고요한 적막을 깨는 어르신이 등장한다. 의상은 전문 산악인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으셨다. 얼굴에는 멋진 고글이 얼굴의 절반을 가리셨지만, 허리에는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블루투스 스피커 한 마리를 달고 나오셨다.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이 아니다 보니 조곤조곤 책 이야기를 하는 유튜버의 목소리에 라디오 소리가 섞여 혼란스럽다. 불행히도 쉬는 타이밍이 같은지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도 소리는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예전이었으면 날씨덕에 오른 불쾌지수에 짜증지수도 샌드위치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려졌겠지. 이왕 쉬는 거 이어폰 충전도 할 겸 어르신 라디오에 귀를 기울여 본다.
채널을 바꾸셨는지 마침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와 귀가 편안했다. 오랜만의 간접 라디오 청취이기도 해서 예전 생각도 많이 나고 해서 의외로 좋은 쉼을 보내게 되었다.
예전 생각이라 함은 라디오를 처음 듣기 시작한 중학생 때다. 그땐 MBC 방송을 많이를 들었고, 이후에는 좋아하는 프로그램 시간대에 맞춰 SBS 주파수와 바꿔가며 들었다. 처음부터 SBS 방송은 없었다. 지금의 KNN 당시 PSB라는 부산방송이 생기면서부터 라디오도 티브이에도 서울방송 SBS가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신가 했다. 자주 듣는 MBC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서울의 본방이 아닌 지방, 부산 자체적으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유명 연예인이 DJ를 맡은 게 아니라, 부산 지역의 방송인들이 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았던 건 우리 동네 이야기 같아서였다. 가끔 우리 동네 사는 사람의 사연이 나오면 마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좋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라디오 생활은 직장생활과 함께 멀어지기 시작했다. 자주 듣던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회사의 야근으로 듣지 못했고,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은 세월이 지난 후 밉게도 먼저 세상을 떠나버려서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한낱 라디오 프로그램일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 추억과 감성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더 아쉬움이 느껴진다.
등산에서 라디오의 추억으로 이어지는 맥락 없는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어쨌든 있을 때 잘해주자라는 것이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하듯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 새삼 느끼게 되었다는 것. 좋아하는 건 충분히 좋아하고, 사랑을 한다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사랑할 것.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않도록.